[디자인 역사 산책 3] 1930년대 식민지 근대 공간과 이상의 시

2014. 4. 11. 01:07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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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회로 예정된 김민수 교수님의 ‘디자인 역사 산책’ 이 벌써 3회차 강연을 맞았습니다. 3회차 강연은 "가상공간에 펼친 날개_1930년대 식민지 근대 공간과 이상(李箱)의 시(詩)”라는 주제로 1930년대 식민지 근대 공간속의 이상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았습니다. 문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문학가이자 건축가, 디자이너였던 융합예술인으로서의 이상의 작품과 생애를 입체적으로 재조명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1주 : 디자인과 삶의 철학
2주 : 독일 바우하우스와 근대성
3주 : 1930년대 식민지 근대 공간과 이상의 시
4주 : 이탈리아 디자인의 역사와 인본주의
5주 : 일본 디자인의 역사와 디자이너들
6주 : 한국 디자인의 역사와 과제들


십여년전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문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상의 시와 글을 마주하고 있자면 늘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도통 난해한 언어들로 씌어진 그의 시를 이해하는게 제겐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디자인 역사 산책’의 세 번째 강연을 앞두고, ‘디자인 역사를 돌아보는 강연에서 왜 느닷없이 문학가인 이상이 등장하는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간략하게 전해드릴 본 강연을 통해서야 문학가이자 건축가이며, 삽화가이자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였던 이상의 생애와 작품을 입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했었던 그의 작품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1. 이상은 누구인가?


이상 李箱 (191
0~1937.04.17)
 
그는 시, 소설, 수필에 걸쳐 두루 작품 활동을 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특히 그의 시와 소설은 1930년대 모더니즘의 특성을 첨예하게 드러내준다. 시의 경우 그가 보여주는 것은 현대인의 황량한 내면풍경이며, 「오감도 시 제1호」처럼 반리얼리즘 기법을 통한 불안과 공포라는 주제로 요약된다. 또한 그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 양식의 해체를 통해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데, 「날개」의 경우 그것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어떤 일상적 현실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파편화되고 물화된 현대인의 소외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이상은 현재까지도 후세에 의해 그의 작품과 생애에 대해 수많은 논문과 책이 나오고 있는 유일한 작가입니다. 이처럼 이상이 세상을 뜬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어지고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학계에서는 그를 언제나 '난해한 작가'로 신화화하고, 때론 그를 성도착자나 정신착란 등으로 폄하하기도 했는데요, 김민수 교수님은 그의 작품을 그가 살아온 공간적 환경과 생애를 함께 보지 못하고 문학의 틀 안에 가두어 해석하려한 문학적 순수주의 혹은 고립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문학적 차원을 넘어서 시각 예술을 아우르는 융합 예술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는 건축가이자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로, 우리나라 최초의 융합 예술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문학과 시각 예술 사이의 매체적 접점 영역에서 발생한 내밀한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이십여년간 직접 이상의 작품에 대해 연구한 김민수 교수님은 이상의 작품과 시각 예술 사이의 관련성은 단지 문학 연구를 보조하고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진행시켰을 사고과정의 작업 논리에 초점을 맞춰 심층적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민수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저서 <이상평전>에 기초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이상의 '1928년 자화상'
이상이 경성고공 재학시절 이던 1928년에 그린 자화상은 얼굴 요소들이 제각각 비정형적으로 탈구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숙한 처리가 아닌 작가의 의도적 표현으로, 자기의 예술적 자아 ‘페르소나’를 최초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극도의 내면 심리를 빛으로 감광시킨 한 점의 포토그램과 같으며, 두 가지의 가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폐결핵으로 각혈하기 전에 병약했던 이상의 심상을 반영한 것이며, 둘째는 독특한 내면적 세계관이 투영된 거울이미지라는 것입니다. 김민수 교수님은 후자 쪽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십니다.

이상의 자화상은 당대의 세계적인 예술사조인 표현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조선에 서양화 기법이 유입된 이래, 이 작품만큼 강렬한 표현주의 이미지가 표명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표현주의와 모더니즘은 불가분의 관계로,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우하우스의 발터그로피우스 등도 표현주의를 거쳐갔습니다. 이러한 이상의 표현주의적 성향은 그의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에서 입체파적인 변형으로 시각이미지가 글로 변환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3. 이상의 성장 배경
이상은 어떠한 성장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예술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상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이 나고 자란 장소의 역사적, 지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상이 어린 시절을 보낸 서촌 일대는 토목과 영선에 관한 일을 수행하는 관청인 ‘분선공감(分繕工監)’ 이 위치하고, 주변에 대대로 전문기술직 중인계급이 모여살았습니다. 이는 이상이 건축가가 될 수 있었던 지리적 환경, 연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이 1934년 발표한 「오감도」 연작시 「시 제1호」 에는 '무서운 골목'에 대한 '장소 이미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문학 이론가들은 ‘공포의 기록’을 기호화한 것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이 공포의 실체는 이상의 백부이며, 이를 이상 문학에 내재된 공포의 근원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이 성장한 ‘장소’를 살펴보면, 그 공포의 대상은 어릴적 체험한 ‘무서운 골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이 성장한 동네의 막다른 골목에는 실제로 친일파 윤덕영과 이완용의 집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 동네 아이들에게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악마같은 집과 마주했던 공포의 경험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구절에 녹아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다른 작품에서도 또 다른 장소적 경험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상은 어린시절 늘 굴착소리와 기계소음을 듣고 성장했습니다. 1915년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박람회장 건립과 1916년 시작되어 1926년까지 이어진 총독부 신청사 건축공사 때문이었습니다. 경성고공에 입학할 때까지 이어진 공사 현장을 목격하며 건축가의 꿈을 품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유년시절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이 건립되는 과정을 목격하였고, 이러한 체험이 훗날 건축가로서 실무 현장에서 겪은 경험과 합해져 시적 이미지의 모체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소적 경험은 대표적인 난해시로 평가받는 ‘且8氏의 出發’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 시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성적인 은유로 해석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且8氏’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 땅을 ‘또-팔-사람’을 뜻하며, 따라서 「또팔씨의 출발」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건축 기초공사인 항타작업을 지켜보며 자라온 이상의 성장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만 집착하여 해석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팔씨’는 이상 자신의 또다른 은유이며, 「또팔씨의 출발」은 식민지의 모조 근대에 맞서 싸우겠다는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는 시로 볼 수 있습니다.


4. 최초의 융합예술가 이상
이상의 삶과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과 건축, 디자인 등 총체적인 시각 예술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상의 작품은 표현주의 뿐만 아니라 상대성이론 등 현대물리학의 지식들, 초현실 주의, 다다이즘과 같은 신예술사조에도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이 건축 잡지인 「조선과 건축」에 발표한 작품인 ‘또 팔씨의 출발’은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균열이들어간장가이녕의땅에한자루의곤봉을꽂는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는 많은 문학가들에게 성적인 은유로 해석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건축신조」와 같은 건축 잡지를 통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접할 수 있었던 이상은 설리번(Louis H. Sullivan), 라이트(Frank L. Wright)를 거쳐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로 이어지는 기능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시의 구절이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관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 시각이미지가 중첩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카펜터 시각예술센터(1962)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xyzt/4331292198/in/photostream/)

또한 「이상한 가역반응」, 「선에관한 각서」 등 기하학 용어들과 기호들이 난무하는 그의 작품들의 구절을 도식화 하면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내재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암호화된 언어는 억압된 시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대적 억압에 의해서 암호문처럼 씌여진 그의 작품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시각 예술의 차원에서 시각적 텍스트로 읽어내어야 숨겨진 측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 전해 드릴 수는 없지만, 이상의 초기 실험시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도식화 하여 해석한 내용들은 김민수 교수님의 저서 「이상평전」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상은 본인의 시를 ‘편’이 아닌 ‘점’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문학에서는 시를 ‘편’으로, 미술에서는 그림을 ‘점’ 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이상은 ‘시’를 시공간을 집약한 그림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며...
이상이 생전에 직접 운영한 제비다방은 건축가로서 자신의 공간미학을 펼치고 싶어한 공간이었습니다. 제비다방의 실내 공간과 기하학적 디자인의 모서리 의자는 현대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미니멀리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식민지 모조 근대건축’에 대한 환멸과 진정한 ‘근대건축’에 대한 그의 열망을 공간적 실천으로 나타낸것이 아닐까요.
본 강연을 통해서 문학가 뿐만아니라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융합예술가인 이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학작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성장배경을 기반으로 한 공간의 개념과 언어를 도식화, 시각화하여 해석하는 등 확장된 시각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짝퉁 근대를 살해하려 치열하게 살았던 이상의 삶.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한 디지털 정보 혁명기에 오히려 열정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는 1930년대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최초의 멀티미디어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출전: 김민수, <이상평전> (그린비, 2012)

ⓒ 김민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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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디자인역사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