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육] 제10회 베를린 비엔날레 후기

2018. 11. 27. 07:50GUI 가벼운 이야기
hyelim

회사에서 제공하는 해외 교육의 일환으로 지난 9월 제10회 베를린 비엔날레(이하 BBX)에 다녀왔습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온 터라 작품 해석에 주관적인 견해가 섞여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2018년 제10회 베를린 비엔날레(이하 BBX)는 지난 9월 9일부로 끝이 났다. 3개월에 걸쳐 베를린 시내 다섯 군데에서 진행된 현대미술전이었다.

'우리는 다른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아(We don’t need another hero)'라는 올해의 슬로건은, 흑인 여가수 티나 터너(Tina Turner)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이 노래는 1985년에 개봉된 영화 <Mad Max Beyond Thunderdome>의 OST였고,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가 직접 부른 노래였다. (노래 가사와 이번 비엔날레 주제 간의 상관성은 이 포스팅 가장 하단에 내 나름의 의견으로 해석해서 기재해놨다.)



이번 BBX의 큐레이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가비웅코부(Gabi Ngcobo)가 맡았고, 그녀가 꾸린 이번 큐레이터 팀은 모두 흑인이라는 점에서 2년 전 열린 제9회 베를린 비엔날레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지난 BB9이 뉴욕기반의 백인 큐레이터 그룹 DIS로 이루어졌고, 현실이 가상현실로 대체되는 상황에 대한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모습을 담아 현실에 대한 쟁점을 가볍게 전시로 풀어낸 점에서 비판 혹은 찬사의 양분화된 평가를 받던 것과 반대로, 이번 BBX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아프리카 및 남반구 지역의 실재하는 현실을 기반으로 과거(탈식민주의, 권력의 범주화 등)로부터 벗어나고 독립하여 온전한 자기를 찾기 위한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을 목표로 전시를 진행하겠다는, 조금 더 진지한 주제와 무거운 쟁점으로 논의의 장을 만들어 냈다.


전시는 주 전시장인 베를린 미술학교(AKADEMIE DER KÜNSTE)와 KW 컨템퍼러리 아트 인스티튜트(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연극장인 VOLKSBÜHNE PAVILION, 레지던시 프로젝트 스페이스 (ZK/U – CENTER FOR ART AND URBANISTICS), 퍼포먼스 장소로 이용된 HAU HEBBEL AM UFER 이렇게 다섯 곳에서 진행됐다. 그 중 나는 주요 전시장인 ADK, KW, ZK/U을 방문했다.


첫날은 KW부터 방문했다. 사실 ADK부터 방문하는 게 전시 흐름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겠지만, 개인적으로 전시를 다 보고 난 뒤 드는 생각은 'KW부터 보길 잘했다'였다. 당시 전시의 성격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전시장을 찾았는데, 그런 나에게 전시의 주제를 보다 직접 이해할 수 있게 구성된 곳은 KW였다.



자기 해체의 장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나를 압도했던 작품은 Lorena Gutiérrez Camejo의 ¿Dónde están los héroes? (Where are the heroes?), 2016였다.

군 서열의 패턴과 색깔을 상기시키는 개별의 그림들이 모인 이 작품은 100개의 개별 그림으로 구성된 3미터짜리 그림이었다. 쿠바에서 살아온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으로, 쿠바의 다채로웠던 역사(피델 카스트로의 독재, 세계 3차대전으로 직결될 뻔한 쿠파 미사일 위기 등)를 추상화된 군용 패턴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KW에서 두번 째로 인상 깊었던 작품은 Grada Kilomba의 Illusions 시리즈(2016 - ongoing)였다. 미디어 아트 작품이었는데, 한쪽에 세로로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소형 스크린에선 작가가 화자가 되어 대본을 읽고 있고, 다른 대형 스크린에선 흑인 배우가 나와 빈 화면에서 연기를 한다. 비디오 작품에선 오이디푸스 신화 이야기를 배우가 연기하는데, 오이디푸스를 흑인 여성으로 세운 점과, 그 밖의 우리가 흔히 정형화 해서 생각하기 쉬운 인물들을 거꾸로 뒤집으며, 우리가 그동안 당연시했던 억압적이고, 인종적이었던 구조를 가볍게 전복시켜버린다.




이번 비엔날레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Okwui Okpokwasili의 Sitting on a Man’s Head, 2018였다.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던 기간엔 작품 활동이 끝나있을 때라 그 장소에 참가자들이 남긴 메모와 텅 빈 공간만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 방 안에 들어가 작가가 알려주는 방식으로 작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이지리아 남동부 여성들의 저항적 운동을 관람객의 참여로 재현한 이 작품은 일반 참여자들이 사방이 비닐로 둘러싸인 빈방에 들어가 천천히 심호흡하며 한발 한발 앞을 향해 걸어간다. 마치 달 위를 걷는듯한 기분으로 명상을 하며 천천히 걸으면서 서서히 추억의 노래를 불러본다. 그 노래가 어릴 때 불러봤던 노래일 수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무작위한 노래일 수도 있겠지만, 이 노래가 나를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며 방의 한 가운데로 걸어간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위들은 1929년 여성들이 식민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행했던 여성 해방운동과 그 결을 같이 하고 있다. 권력층의 폭력적 관행에 맞서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에 대항하는 저항의 몸짓에 관객도 참여해 볼 것을 작가는 종용하였고, 이를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있게 탐구해 보고, 자기보존의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경험을 선사해준다.




빈방에서 나오면 관람객이 앉을 수 있게 빈 원형 의자가 있고, 주변 테이블엔 참여자들의 짧은 메모가 쭉 펼쳐져 있다. 작가는 빈방에서 나와서도 친구나 낯선 사람에게 질문해 볼 것을 제시한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믿기지 않았나요?” 작가는 방에서 나온 관람객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낯선 이에게, 혹은 친구에게 털어 놓을 것을 종용한다. 익명이 되길 원하는 사람에겐 작은 종이 한 장과 펜을 하나 쥐 주며, 나의 이야기를 담담히 적어 내려갈 수 있도록 테이블 마련해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여성

이번 BBX에선 여성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 작품을 전부 소개할 순 없지만 기억에 남는 작품 몇가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앞서 말했던 과거로부터의 독립의 일환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여성’이라는 키워드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인종, 여성, 약자 이 키워드는 자주 친구처럼 따라붙는다. Joanna Piotrowska의 사진과 비디오 영상 작품, Julia Phillips의 조각 작품, Patricia Belli의 작품, Ana Mendieta의 드로잉 작품 등 다 열거하진 못했지만 많은 작품이 그러했다.



특히 Joanna Piotrowska와 Julia Phillips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영상기에서 한 여자아이가 자신의 신체를 동원해서 알파벳을 만드는 비디오 작품이 있었는데, 침략적 자세와 방어적 자세를 취하며 갈등에 대해 표현하고 있었다.



이 작품 옆으로 작가의 다른 사진 작품들도 있었는데, 가족 구성원의 표정과 자세가 불편한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구성 원칙을 암시하는 신체 일부가 보인다.


독일의 가족 치료사 헬링거(Helinger)의 가족 세우기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가족이라는 체계의 일부가 되어 가족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깊은 관계성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영향을 받고, 또한 관여하게 된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77255&cid=62841&categoryId=62841)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형적 가족의 형태는 오늘날 사회적 트라우마의 원천이 되며, 이러한 불행한 관계를 자각함으로써 얽힌 관계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Julia Phillpis의 작품도 사회적 관계에서 몸이 갖는 의미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었다. 두 작가 모두 작품을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이물감이 들었다. 작가는 대상의 온전한 형태를 보여주기보다는 인체 일부의 표면만 옮겨온 것 같은 자극적인 형상으로 보여준다. 스타킹을 쭉 잡아당겨 검은 잉크에 묻혀 종이에 찍어낸 작품은(위 왼쪽 사진 참고) 신체의 일부를 상상하게 하고, 폭력과 저항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으며 결국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자국처럼 남아버린다. 흑인 여성의 몸에 가해진 의학 폭력의 역사를 반영한 이 작품은 차가운 유산 기구들을 통해 자행되어 오던 가학적 폭력 행위에 대해 오감을 자극하게 한다. 시각적으로만 바라보더라도 그것의 촉각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현재, 과거로부터의 독립

이번 BBX의 큐레이터 가비 웅코부는 그녀의 인터뷰 영상에서 자신의 현실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다. 현재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미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텍스트를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알 수 없음을 제거하거나 해결해 보려고 하지 말고 시대에 뒤떨어진 회귀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다.

(출처 : 월간 미술세계, 비엔날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묻다!, 박기영 서울 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그녀가 말한 현재는 지나친 미래 의식 때문에 현재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말에 일부 동의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지나치게 미래를 의식하기 이전에 과거로부터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는 간섭을 받으며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명확한 독립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 됐든 ADK에 있는 많은 작품이 끊임없이 우리는 과거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왔으며,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말하고 있었다.




Lubaina Himid가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잊혀 가는 전통을 차용해 현대적으로 위트있게 푼 작품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이번 BBX 여러 전시장에 걸려 있었다. ‘캉가'라는 동아프리카 여성이 몸에 두르는 화려한 무늬의 면포에 격언을 써넣은 전통 의상의 형상을 따와 현대적 의미의 슬로건을 적어 만든 작품이 연작으로 곳곳에 걸려 있었다. 실제로 ‘캉가’는 개인적인 발언에 소극적이었던 동아프리카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전통처럼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Lubania Himid의 작품은 특이하게도 화려한 무늬를 대신해 인체의 장기를 그려 넣고, 다양한 시인의 시 구절을 적어 놓았다. 언뜻 연결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그림과 문구가 절묘하게 매치되는게 작품 자체를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모근 그림에 “Tenderness only we can bear(우리만이 견딜 수 있는 끈기)”라는 문구를 배치한다든지, 여성의 가슴 안에 홍채를 그려 놓고 “Why are you looking....(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라는 식으로 재치있게 이미지와 텍스트를 배치해 의미를 한 번 더 비꼬아버린다.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작품으로 ADK에 있던 Firelei Báez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아마도 BBX 측에서 추천하는 대로 전시장을 찾았다면 가장 먼저 보게 됐을 작품으로, ADK 건물 앞에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작품인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세워져 있다. 작품의 제목은 <19° 36’ 16.89“ N, 72° 13’ 6.95“ W) / (52.4042° N, 13.0385° E, 2018>로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 위치한 상수시 여름궁전과 이름이 같은 아이티 궁전의 위/경도 값이다. 이 작업은 두 궁전을 혼합한 조형물이라고 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던 아이티 흑인들이 독립을 이루고 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라미에르 언덕 아래에 지은 상수시궁전은 침략자의 궁전을 닮은 모순된 공간이며, 작품에서 곳곳에 폐허가 된 듯이 부서진 건물의 모습은 지진으로 인한 재앙의 공간을 담고 있다.




이번 BBX에서 가장 흥미로웠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작품은 Mario Pfeifer의 미디어 작품이었다. 2016년 5월 독일 동부의 한 슈퍼마켓에서 4명의 남자가 한 아랍인 젊은이를 때리고 끌고 나왔다. 그는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나무에 묶여 있어야 했다. 사건의 전말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그는 구입한 전화카드 구매 후 환불하고 싶었지만, 점원과 말이 통하지 않았고 화를 참지 못한 그 남자는 근처에 있던 병을 들어 주변 사람들을 위협했다. 이때 슈퍼에 있던 네 명의 남성은 그 남자를 저지하기 위해 그 남자를 나무에 묶었고, 이 사건은 가게에 있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촬영되어 유튜브로 퍼졌다. 당시 여론은 피해자를 비난하며 이 네 명의 남성이 슈퍼마켓과 슈퍼마켓의 고객들을 보호했다는데 지지했다. 2017년 5월에 다시 소송 재판이 열리려 했지만, 피해자는 재판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숲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가해자들은 시민들의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사건은 무죄 판결로 끝났다.

작가는 이 사건을 재조명하며 의도적으로 배우를 고용해 TV쇼 형태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독일 동독으로 온 이주민들을 시민 배심원단으로 모아 이 사건을 검토하고 판결을 내린다. 극우파의 반난민 정서를 통해 과거에 자행되었던 독일의 민족주의가 다른 형태로 다시 반복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번 BBX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는 옛 철도 창고를 전시장으로 재구성한 예술 및 도시학 센터 ZK/U였다. 베를린 비엔날레 자체가 지역 도시를 기반으로 두고 성장해 왔고, 일반 미술관에서만 전시를 하는 게 아니라 학교, 교회, 지하창고, 지붕 옥상, 비어있는 가게, 집 등 도시의 다양한 장소에서 미술 실험을 펼쳤던 이력을 상기해보면, 이번 ZK/U에서의 전시도 그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이미 여러 번 다른 회차의 BB에서 ZK/U에서 전시를 해왔었다.)




이곳에서 흥미로웠던 작품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Heba Y.Amin의 <Operation Sunken Sea(The Anti-Control Room), 2018>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엉뚱한 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대륙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상상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그 상상력이 실재인 양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 지도자들의 뉴스 속 모습과 정중앙에 작가 자신이 이 신대륙의 대통령이라는 가정으로, 담화문을 발표하는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이 신대륙의 이름을 ‘아틀랜트로파’라 이름 짓고 아프리카가 유럽 자원을 이용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 줄 것을 주장한다. 작가는 정성스럽게 이 새로운 국가의 국기를 만들고 스스로를 지도자로 자처한다. 이 엉뚱한 상상으로 그녀는 유럽에 만연한 아프리카 중동 이민자에 대한 공포를 해소할 수 있고 불필요하게 낭비되어왔던 전쟁과 테러의 비용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소 황당해 보이지만 이 황당함이 반복되어온 억압적 역사적 인식의 고리를 끊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촉매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ZK/U의 지하 벙커 같은 공간에 마련된 Tony Cokes의 클럽하우스 비디오 아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정치와 시민적 표현 방식이 어떻게 언론의 관습적인 이미지 표현에 영향을 받고 따라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작가는 이미지가 배재된 타이포만으로 화면에 뉴스나 기사의 내용을 보여주고, 배경음악으로 팝이나 락 음악을 들려준다. 이로써 관람객은 이미지와 단어를 분리해서 바라보고, 내용과 정반대되는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며 조금 더 객관적으로 기사와 뉴스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평상시라면 관습적으로 여겼을 기사와 뉴스가 상당히 비합리적으로 표현된 내용이 많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마치며

알랭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읽다 보면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 중 “균형 회복”을 설명한다.


예술의 한 역할은 우리의 정서적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 나은 자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묵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삶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할 수 있는 주체는 개인뿐만이 아니다. 인간 집단, 더 나아가 사회 전체도 우리의 삶을 균형 있게 잡아주기 위해 예술에 의존할 수 있다.


이번 BBX가 던지는 메시지는 개인보다 사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현실에서도 처참하게 반복되는 아프리카 및 남반구 지역의 현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BBX의 비주얼 컨셉이 위장무늬 패턴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같은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을 거란 추측을 해보게 만든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사회적 메시지에서 출발했던 작품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균형의 회복을 촉구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습과 그 폭력성을 회복하는 일은 그것들로부터 독립해 나와 스스로 본연의 본질을 찾으려 할 때가 아닐까.



We don’t another hero.

We don’t another hero.


hero라는 단어에서 re를 빼면 he(그)가 되고, o를 빼면 her(그녀)가 된다. 영웅은 순식간에 그저 평범한 사람(남녀 통칭)이 된다. 문제를 해결해 줄 영웅은 결국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참고##해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