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31. 07:50ㆍUX 가벼운 이야기
들어가면서
2018년 2월에 장례 및 임종 경험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에 대한 사례를 모아서 <죽음의 경험 디자인 - 사례소개>이라는 글을 썼다. 이번 글에서는 죽음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20살 겨울, 할머니의 장례식
나는 죽음에 관심이 많다. 20살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에 관심이 많아졌다. 친할머니의 죽음이 나에게는 가까운 사람이 하늘나라로 간 첫 경험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안좋은 편인데도 10년 지난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죽음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하나 하나 기억이 20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죽음에 가까워질 수록 할머니가 어린 아이처럼 작아지던 모습, 할머니 시신을 깨끗이 닦아 분홍색 한복을 입혀드리던 장면, 창문 너머로 보인 노랗고 고무같던 할머니 피부, 처음 가보는 화장터에서 맡은 냄새, 불길의 열감, 처음 봤던 크고 두꺼운 고동나무 색깔의 커다란 관…
당시에 장례식을 치르던 이틀, 삼일 간은 바쁘게 사람을 맞이하고, 버스로 이동하고, 지켜보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작 가장 슬퍼해야 할 시간은 어리둥절하게 지나가고 다시 가족과 일상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다니고, 길을 걷다가 할머니가 살던 아파트, 할머니가 앉던 자리를 보면 문득 할머니 생각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사라졌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지내고 있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지겠지 하면서 어물어물 20대 초반이 지나갔다.
죽음 앞에서의 착한 거짓말
"곧 퇴원하실 거예요. 집으로 오셔야죠."
죽음의 과정에서, 내 마음에 남았던 아픔, 지금도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는 고민이 있다. 우리가 죽어가는 할머니를 진실로 대하지 못했다는 아픔이다. 의사는 우리에게 할머니가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할머니가 곧 우리를 떠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할머니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우리 부모님이 아프시다면, 내 입으로 의사의 얘기를 전해드릴 자신은 없다.)
우리는 할머니가 곧 가실걸 알았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 언제나 할머니가 곧 나으실 것처럼 이야기했다. 마지막까지 할머니와 우리의 대화는 병, 아픔, 약, 식사라는 4가지 주제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를 떠나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할머니에 대해,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병과 약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나는 할머니를 더 알 수 있는 시간이 있었지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바람을 가지셨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할머니와 이별했다. 동시에 ‘곧 나으실거예요’라는 말이 할머니로 하여금 우리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게 한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병과 죽음에는 내가 이야기한 것 말고도 많은 불편한 문제가 있다. 간병의 피로함과 유산 배분, 병원비, 수술 결정.. 비교적 어린 나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한정된 돈, 시간, 체력을 가진 우리에게 현실적인 갈등을 유발한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고 있지만, 디자인 차원에서 문제를 더 잘 해결하도록 도와줄수 있을까. 또한 애정을 쏟았던 반려동물, 사랑하는 부모님의 죽음은 내가 경험한 할머니의 죽음과는 또다른 차원의 슬픔일 거라 예상한다.
죽음을 경험하는 두가지 경로: 타인과 나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는 경우는 두가지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은 태어나 한번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가까운 타인이 될수도 있고, 뉴스 기사 이야기에서 보는 모르는 타인이 될 수도 있다.
실존주의 철학가 하이데거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실존적 죽음이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자기에게 이런 죽음이 찾아올리 없다고 생각하는, 멀리 있는 죽음 으로서의 태도다.
죽음을 은폐하면서 회피하는 태도가 워낙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서로 함께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종종 이렇게 꾸며댄다: 당신은 이제 금세 괜찮아져 다시 당신의 잘 배려된 세계의 안정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런 식으로서의 '심려'는 심지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정감을 배려해준다. 그러나 이 안정감은 근본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마찬가지로 ‘위로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 -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묘사하는 후자의 죽음에 관한 태도는 내가 할머니의 죽음에서 경험한 것과 동일하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터부시 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의 죽음을 회피하고, 꾸며대게 만든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하는 의도 이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이런 식으로 본인에게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 - 장례 경험 디자인
2년 전 <죽음의 경험 디자인 - 사례소개> 글을 쓸 때는 타인과 나의 죽음을 구분하지 않고 작성했다. '장례'와 '임종'에 차이가 있다고만 생각했다. 두가지 경우 다 사람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으로 불안해하고, 회피하고 싶어한다 라는 제약 조건이 있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의 케이틀린 도티는 미국의 장례 문화 문제점을 지적하며, 장례 과정에 포함된 시체 방부처리가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의 한 단면이라 이야기한다. 병원의 의료체계 역시 죽음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소비 시장은 젊음을 찬미하고 노화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잘 죽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지적한다. (권인걸 님의 "소중한 이의 죽음을 나는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참고)의사의 지시에 따라 병과 치료에 집중하게 만드는 의료 시스템, 시신을 화장하고 보존하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까.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면 이를 강화시켜주는 게 좋은 디자인일까, 이를 극복하고 우리가 '잘 죽을 수 있도록' 죽음을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일까.
죽음과 삶은 서로를 분명하게 만든다
본래의 자신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역할과 상황들 밑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숨어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려면, 일상적인 일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입고 있는 옷에 이르기까지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 『인생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정신과 의사이자 임종 연구자 -
이번 글에서 '죽음의 경험'을 다뤘지만 죽음과 삶은 서로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디자인하는 제품과 서비스는 사람들의 죽음 이전의 삶의 시간을 메워준다. 유한한 시간을 편리하게, 즐겁게,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 보조한다. 금융 거래를 편리하게 해주고, 다양한 제품을 쇼핑할 수 있게 해주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죽음 앞에서 내가 살았던 삶의 의미가 더 분명해 진다고들 한다. 내가 그동안 내렸던 선택이 진정 원하던 선택이었나, 외부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디자인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사람들의 한정된 시간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 또는 시간을 의미있게 쓸 수 있도록 부수적인 일에 시간을 절약해 주면 좋겠다.
[참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나는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권인걸
이반일리치의 죽음과 실존주의, 생각공장
(21)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나타난 인간의 심리, 김영조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공부하는 세무사
하이데거와 톨스토이의 죽음 이해, 서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