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 사장의 착각

2013. 9. 17. 01:54UI 가벼운 이야기
이 재용

여러 모임에서 에이전시 대표들을 만나다보면, '소위 좀 잘 나간다'하는 에이전시 대표들이 자랑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뿌듯해하면서 하는 전형적인 말들이 있다. 나 자신도 그 프레임 안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나를 포함한) 에이전시 사장의 '자연스러운 자랑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린 다른 회사와 다르다'로 표현할 수 있는데, 사실 여기에서 내가 하려는 말은... 현실은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이다.



여기는 왜 이렇게 비싸냐?
에이전시 사장들은 '고객들이 여긴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한다면서 은근히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은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인 것 같이 표현하지만 실은 살짝 자랑'인 말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얘기는 누구나 다 듣는다.
잉? 정말? 나는 우리만 듣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심지어 시장 콩나물 아주머니도, 여기 왜 이렇게 비싸냐는 말 듣는다더라. 다만, 고객이 '왜 이렇게 비싸냐?' 말한 그 다음이 정말 중요하다. '여기 정말 비싸요. 비싸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면 진짜 자랑스러워 할 만하다.

하지만 만약 '왜 이렇게 비싸요? 아 사장님 너무 잘 나가시는 것 같아요... 조금 깎아주세요'라고 말했다면, 그 말인 즉슨, '가격이 비싼만큼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라는 뜻이다. 심지어 그냥 품질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너희 너무 못 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거기 (품질에 비해) 너무 비싸요'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다. 솔직한 고객들은 '솔직히 이 가격 차이만큼 품질이 차이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이번에 싸게 해서 거래를 트면 다음부터 더 많이 주겠다.
아울러 조심해야할 연결 문구는 이것이다. '너무 비싸다. 처음 거래라 그럴 순 없고, 이번에 싸게 해서 거래를 트면 다음부터 더 많이 주겠다' 나도 처음엔 이 말에 많이 혹해서 정말 싸게 해 주었다. 어차피 우리 회사는 포트폴리오도 필요한 시점이었으니까. 이렇게 혹해서 싸게 일해준 곳은 알만한 유명 대기업/포탈 모두 포함된다.

심지어 한 대형 회사는 UX 담당자가 위와 같이 말해서 결국 (당시로서는) 최신 방법론인 퍼소나, Affinity 등등 다 가르쳐주었고, 담당자들은 신기해하며 열심히 배웠다. 실제 받아야할 가격의 1/5에 '전략 단계'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 후속인 구현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앞에서 못 받은 금액까지 포함하여 가격을 높게 써서 냈더니, '가격이 너무 비싸서' 떨어졌다.

'싸게 해서' 시작하면 높아질 것 같지만, 현실에서 금액은 첫 번째가 가장 높다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가가 떨어지는 일은 있어도, 올라가는 일은 보지 못 했다. 아울러 끊임없이 시장에 진입하는 배고픈 신생 업체들은 위에서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전략으로 대기업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저가에 우수한 품질의 수행을 한다. 이런 회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단가는 더욱 급격하게 떨어진다.

사실 담당자가 다음을 약속하며 가격을 깍으려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나도 골목 가게에 가서 '앞으로 자주 올께요'하며 가격을 깍으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한 번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에서 그걸 믿는 사람이 바보다. 다음 프로젝트에서 돈을 더 줄 권한이라는게 애당초 그 담당자에게 없는 권한이다. 설령 그런 초기업적 담당자나 '임원급' 담당자라고 하더라도... 다음 프로젝트할 때까지 그 사람이 그 일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 전에 회사를 나갈 수도 있는 사람이고. 애시당초 '약속'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고급스러워 보이려고 일부러 비싸게 받을 필요도 없고, 포트폴리오로 필요하다고 지나치게 싸게 받아도 결국은 그 피해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상대 담당자가 '다음 프로젝트를 약속하면서 가격 인하를 요구'하면 밝게 웃어주고, 언제나처럼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자.


다른 곳이랑 거래하다가 불만족스러워서 왔다
다른 곳에선 불만족스러워하던 사람이 우리 회사에 와서 만족했으니, 우리가 문제 해결의 종결자인 듯 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여기랑 거래하다가 떠나간 사람들도 다른데 가서 그렇게 말할거다. 즉, 자기는 늘 문제가 생겨서 온 사람만 만나지, 떠난 고객들은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긍정적인 피드백만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일하는 고객들은 모두 만족스러워 한다
당연하다. 그러니까 거기랑 일하는 거다. 불만족스러워하는 고객들은 이미 모두 떠나갔겠지. 위와 같은 논리다.


우리는 영업/마케팅 안 해도 된다. 맨날 거절만 해서 죄송하다
영업/마케팅 안 해도 계속 일이 들어오니까 그런 생각을 할텐데 거기엔 제안회사 3배수 연락의 허점이 있다. 즉, 늘 있는 프로젝트보다 3배수 이상의 회사에 연락을 하다보니까 항상 연락이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아무리 연락 많이 와도 소용없다. 아니,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의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들어오느냐?'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그렇고 그런 회사들 가운데 3배수에 뽑혀서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수의 제안 요청이 들어오는건 당연한거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이 세상 모든 갑의 프로젝트를 을이 수용하여 해결한다고 가정하고, 갑 회사가 항상 3배수의 회사에게 제안 요청을 한다면, 모든 을 회사는 3배수의 요청을 받게 되고, 요청 들어오는 프로젝트의 2/3를 거절하는 것이 업계 평균이 된다. 오히려, 할 수 있는 일보다 3배수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회사가 심각하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럼 성장하는 회사는 어떻게 알 수 있나?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작년보다 더 좋은 조건의 프로젝트가 들어오고 있나?' 아니면 영업/마케팅 해야한다.


'요즘 잘 나간다' 우린 우리의 길을 간다. 협회/교류는 필요없다.
우린 다른 에이전시와 다르다. 고고하게, 디자인 실력도 차이나고, 가격도 더 비싸다. 아 우리랑 거기랑 비교하는 것도 좀 기분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는 에이전시 대표들 참 많다. 다른 곳을 벤치마킹할 필요없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협회 활동이 필요없다... 필자 자신도 이렇게 한동안 생각했으나, 협회 모임에서 대표들의 다양한 생각, 다양한 경영 방식이나 경험을 들어보면 배울 것이 정말 많다. 나랑 생각이 같을 때도 놀라고, 다를 때도 놀라지만, 언제나 느끼는 건, 거의 모든 사람의 고민/문제가 동일하다는 점. 우리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디스트릭트에서 배웠다.


우린 성장하지 않겠다
피엑스디도 처음에는 20명 정도의 작은 회사로 끝까지 개성을 가진 부띠끄이고 싶었다. 작고 오래가는 개성있는 스튜디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깨달았다. 계속 작게 갈 수 있을 것 같나?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나는 계속 나이를 먹는데, 클라이언트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우리가 작은 규모의 회사라면, 우리는 항상 대기업의 대리/과장들과 일하고, 그 분들은 항상 새로운 분으로 교체되어 늘 그 나이를 유지하는 반면, 나는 계속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다. 어느 순간, 클라이언트 담당자들이, 내가 회의에 들어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내가 늙어가고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나는 더 많은 생활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화면 설계만으로는 도저히 내 월급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나는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 분위기가 좋아 근속 연차가 많은 사람들이 늘어가면 갈수록, 그 사람들이 좀 더 고부가가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신입 사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회사가 어쩔 수 없이 커지는 거다. 에이전시가 싫으면 다른 사업을 하자. (혹시 대표가 결혼 안 하고 계속 독신으로 산다면 가능할지도)


우리가 하면 뭐든지 잘 할 수 있다.
디자인 회사들은 자기의 전문 영역을 인정해달라고 하면서도, 남의 전문 영역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UX는 전문성을 인정해 달라고 하면서도, 인접 디자인 분야나, 다른 산업 분야는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


우리만의 노하우를 지키리라. 오픈소스와 신비주의
자신만의 노하우, 꽁꽁 싸매고 갖고 있으면 재산되나? 그런 시대는 지났다. 2008년까지만해도 나는 그런 생각 많이 했다. 회사 방법론, 소스 코드, 심지어 포토샵 레이어까지 회사 노하우고 유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대개 제조업 마인드다. 현대 사회는 고유 노하우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미미하고, 대신 그것을 공유했을 때 생기는 리더십 향상이 더 큰 부가가치를 낳는다. 피엑스디도 2009년부터 서서히 그것을 깨닫기 시작해,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퍼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회사는 좋다, 우리 대표님이 좋다'라고 말한다
우리 회사는 수평적이다. 조직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다. 이런 말 많이 들을 것이다. 그게 사장이 좋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회사 분위기가 나쁠 수가 없다. 왜냐? 업무 강도가 너무 높고 프로젝트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내부에서까지 스트레스 주면, 수직 구조로 쪼면, 남아 나는 사람이 있겠나? 당연하다!
대기업은 회사도 안정적이고, 월급도 많이 주니까 위에서 쪼아도 안 나가고 버틴다. 기는 척이라도 해야한다. 그러니까 위에서 마음대로 까는 거다. 하지만 중소기업, 그것도 에이전시. 아쉬울 게 뭐가 있나? 나가면 널린게 에이전신데. 어차피 월급도 적고. 그러면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 없다. 월급으로 인간 대우 못 해주면, 마음으로 사람들 인간 대우 해 줘야하고, 자유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덜 나간다. 
우리만 인테리어 신경쓰고, 우리만 좋은 기업 문화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그것에 뿌듯하게 생각하다가도, 다른 에이전시 인테리어 보면, 다른 에이전시 기업 문화 보면 우리보다 더 좋은 회사들이 많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그것이 에이전시 생존 법칙이고, 다른 에이전시들도 다 그렇게 한다.


위에 적은 생각들은 실제 모두 나의 생각이었고, 아직도 간혹은 그런 마음에 흐뭇해지기도 하고, 그런 말에 착시에 빠지기도 하지만, 빠져 나오려고 하는 생각의 틀 들이다.
[참고##디자인 경영##]